영모가 사라졌다. 온 몸에 멍이 들도록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날 밤, 영모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병구는 영모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공부도 잘하고 학원도 잘 다녔다. 책도 많이 읽고 착하다. 그런데도 영모는 아버지한테 자주 맞는다. 공부도 못하고 매일 말썽만 피우는 병구도 맞고 살지는 않는데, 영모가 이렇게 험한 꼴이 될 정도로 맞는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영모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가장 궁금하다. 기껏해야 어른들 몰래 도둑고양이에게 먹을 것 정도 가져다주는 소심한 영모인데, 한 달이나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다.
병구가 도둑고양이의 도움을 받으며 영모를 찾아간 곳은 라온제나였다. 높은 담 하나를 훌쩍 넘으면 불쑥 나타나는 라온제나. ‘즐거운 나라’라는 뜻을 담고 있는 라온제나는 영모처럼 깊고 큰 상처받은 아이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현실에서의 고통과 슬픔을 잊고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곳이다. 병구가 라온제나에서 제일 처음 만났던 로아도 어른들의 안락함을 위해 어린 나이에 산 재물이 될뻔 했던 아이다.
왜 아이들은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항상 순응만이 최선의 방법인양 무력하게 살아야 하는지. 라온제나는 슬픔을 가진 영모가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 마음 깊숙한 곳에 가지고 있는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약한 존재이기에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저항은 모진 폭력이나 압력에 짓눌릴 뿐이다.
지난주 쌀협상 국회비준안이 통과되면서 농민들의 시위가 점점 극에 치닫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쌀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죄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을 정도이며, 쌀농사를 짓는 만큼 빚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현실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땅을 생명이라 생각하고 땅에 순응하면서 살아왔던 수많은 농민들이 국제관계라는 제도에 휘둘려 온 몸에 멍이 들고 있다. 자신들이 살아남는 방법을 하나씩 둘씩 빼앗기면서도 오히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온갖 난무하는 제도와 힘을 가진 자들이 정해주는 것을 그대로 지킬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씨오쟁이를 엎어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손안에 남아있는 것까지 모조리 털어버리려고 한다.
오로지 순응하는 것만을 배우고,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라온제나를 꿈꾼다. 현실에서의 나를 완전히 포기한 채 순수하고 소박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라온제나로 가고 싶어 한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나섰다가 고인이 된 고 전용철씨. 그렇게 바라마지 않는 삶, 걱정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라온제나에 제대로 찾아갔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