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4월13일은 국가 기념일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약칭)] 수립일이다. 임정의 수립은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정신사(精神史)와 독립운동사적 측면에서 상당한 의의를 지니는 사건(史件)으로 받아들여진다. 대한의 광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자주와 평화 등 대한민국 국가정신의 원류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광복과 함께 분단이라는 새로운 비극이 시작되어 올해로써 분단 70주년째를 맞이한 상황이다. 이에 올해의 국정과제이자 민족의 숙원인 분단 극복의 단초 마련을 위해 96년 전 임정의 수립 과정에서의 보여준 통합과 포용의 역사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임정이라 하면 중국에서 수립된 상해 임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한반도 내외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상해 외에도 6개나 더 있었다. 어느 정도 일반에게 알려진 서울의 한성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령정부를 비롯하여 인천의 조선민국임시정부, 평안도의 신한민국임시정부, 만주의 고려공화국임시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이 있다. 정부를 필요로 했던 대한의 명의는 하나요, 그 터전인 한반도와 정부의 주체가 될 민족도 하나뿐이었는데 그를 대표하려는 정부는 7개나 되었던 당시를 임시정부의 난립이라 표현해도 심각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병립한 7개의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론적 노선, 좌우 이념에 대한 성향, 舊황실에 대한 태도, 주요 수립 기반 등의 측면에서 조금씩 달랐고, 사안에 따라서는 그 입장이 완전히 배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독립운동의 노선에 대한 갈등은 임정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던 1923년 국민대표회의로 이어지기도 했을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또한 병립한 임시정부를 통합한다는 거시적 차원의 합의는 이루어지더라도 통합된 임시정부의 주도권에 대한 각축전은 임시정부의 통합을 방해하는 또 다른 요소였다.
그럼에도 각지에 수립된 임시정부들은 단기간에 분열을 마감하고 1919년 9월 6일 하나의 임시정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통합 임시정부의 대통령 중심제는 노령정부에서 비롯되었고,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본부의 위치는 상해정부의 것을 따랐으며, 통합정부의 법통과 정부조직은 그 기반이 가장 튼튼했던 한성정부의 것을 수용하기로 했다. 한편 비교적 영향력이 미미했던 나머지 네 개의 임시정부 또한 통합 임시정부에 포섭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통합을 이룩했다.
이처럼 7개의 임시정부가 비교적 단기간 내에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대한의 독립이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상해의 통합 임시정부 출범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민족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거시적 시각과 서로 다른 생각을 포용하는 대승적 견지, 개인보다는 민족 전체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는 이타적인 자세와 애족의 정신의 발현이 병행되었기에 통합 임시정부의 수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7개나 되었던 임시정부는 민족의 독립이라는 지상 목표와 선공후사의 대의를 통해서 그 분열상을 극복할 수 있었고, 이에 힘입어 민족의 독립역량은 신장을 거듭하여, 통합 임시정부 수립 26년 만에 광복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시작된 분단이 70년에 이르러 이제는 그 형세가 고착화되는 상황이다. 이에 그 타개책을 강구해 봄에 95년 전의 임시정부 수립 및 통합의 역사는 그 실마리[端初]가 될 수 있을 것이다.
95년 전의 7개 임시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남북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정하고, 그를 위해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과거로 기록될 한반도의 역사를 생각하고, 이 땅에서 살아갈 후대를 배려하며, 세계로 뻗어나갈 한민족의 무한한 가능성을 헤아려야 한다. 이로써 분열을 극복한 통합 임시정부의 역사를 오늘의 남북이 계승할 수 있다면 분단 70년의 극복은 그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