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러오는가, 흘러가는가, 순환하는가, 반복하는가, 팽창하는가, 수축하는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는 그저 우리네 현실인식의 기준에 따라 재해석된 가상일 뿐인가? 사실로서의 역사와 진실로서의 역사가 따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동시에 같이 존재하는가?
멀리 60갑자의 열배, 그 너머로 가보자. 징기스칸이 유럽까지를 말발굽 아래 두었을 때, 우리나라 역시 무력을 앞세운 군사정권의 세기였다. 붓은 칼 아래 누웠고, 칼은 또 다른 칼을 불렀다. 칼을 피하고자 창에 몸을 맡겨 원의 속국이 되었다. 고려국민은 곧 원의 국민, 전국민이 이중국적자가 되었다.
고려의 제25대부터 30대까지는 원에 충성한다는, 충성 충자 돌림의 왕들이 줄을 이었다. 첫 단추는 충렬왕이다. 그는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나이 40이 넘은 유부남이 금 천여근을 예물로 마련해, 권세를 업었다.
변발에 호복차림을 하고 고려로 돌아와 혼혈인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장성해 다시 원나라 공주를 맞았다. 연경에서 혼례를 치르고, 보름 만에 모후인 제국공주가 병사하니, 새신랑인 세자가 급거 귀국해 부친의 수족을 숙청해버렸다.
그렇게 충선왕이 대권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출신이 다르고 정서와 이익이 다르니, 부부간이라도 정 나기가 쉽지 않았다. 공주와의 불화가 깊어지자 황실이 불신하게 되고, 권력과의 괴리가 생기자 원의 사신이 국새를 빼앗었다. 왕위가 다시 충렬왕에게 돌아가니, 7개월만이다. 그가 일흔이 넘어 귀천하자, 충선왕이 다시 왕위를 맡았다.
무너진 기강을 확립하고 일단의 개혁적 조치를 취했으나, 그의 길은 권좌가 아니었다. 꼭두각시를 세워 리모콘 정치를 하다 그나마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연경에서 만권당을 짓고 글과 그림과 학자들에 묻혀 살았다. 그러나 금으로 된 대야에 두 손을 씻는다고, 강호의 은원이 없어지겠는가. 환관 하나와 틈이 벌어지자, 참소를 입고, 티벳으로 내쳐졌다. 이제현의 소청으로 3년 만에 풀려났으나, 이역 하늘에서 눈을 감았다.
충숙왕은 아버지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양위를 받았다. 성정이 굳고 밝아 제도의 정비며 살림살이를 챙겼으나, 사촌인 심양왕 고가 무고하자, 연경에서 5년여 발걸음이 묶였다. 여차여차하여 아들에게 양위했으나, 왕위를 이은 아들 충혜왕은 성도착증환자였다. 2년만에 다시 왕위를 맡았다. 후일 충혜왕이 재집권 했으나, 그 사디스트적 성향이 도를 넘었다. 원나라 사신이 왕을 포박, 귀양 보내다 독살했다.
충혜왕이 비명횡사하자, 여덟살백이 아들이 원나라 순종을 만났다. 순종이, “너는 아버지를 섬기려느냐, 어머니를 섬기려느냐?”라고 묻자 “어머니를 섬기련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가 충목왕이 되었다. 4년만인 열두 살에 하늘나라로 가니, 후임이 충정왕이다. 열둘에 재위에 올라 열다섯에 강화로 추방되었다가 독살되었다.
충자 돌림에 종지부를 찍은 이는 공민왕이다. 그는 즉위하자 변발을 풀어헤치고 원나라 옷을 벗었다. 간난의 신고였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은 재위 중 폐위되었다가 복위하였고,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의 재위기간은 채 5년도 안 되었다. 태조로부터 나라에서 시호와 묘호를 지었으나, 충자 돌림 왕들은 묘호마저 없었다.
충렬왕부터 공민왕대까지, 이 질곡의 흐름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당대의 지성인 익재 이제현의 싯구 한 구절이, 이를 풍미하는 듯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 얼마나 남았는지
칼날 같은 찬바람에 얼굴이 찢어지는 듯하네.
그대는 못 보았나 백 년 동안이 꿈결 같아서
한 해가 갈수록 슬픔만 더해지는 것을.
장강의 뒷 물결은 끊임없이 앞 물결을 밀어내, 고려의 뒤를 조선이 이어, 대한민국이 되었다. 밤이 지나면 낮이 왔고 새가 울고 다시 얼음이 얼었다. 태평성대도 있었고, 병화에 휩싸인 아픔도 있었다. 민초들은 갈대처럼 누웠다가 꽃을 피웠고 열음을 열었다. 자빠졌다간 제쳐지며 삶의 의미를 물었다. 그렇게 오늘까지 왔다.
이제 이 밤이 가면 새 날이 또 밝는다. 새 하늘 새 땅에서는 더 이상 운명이 우리 등을 밀어내지 못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기미를 살펴, 시대를 읽어야 한다. 정치란 본디, 바르고 밝고 따스하게(政), 모든 생명이 사는 듯싶이 살게 하라는(治), 하늘의 명령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