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생존율이 13%에 불과한 치명적인 췌장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암 백신을 투여한 결과, 놀랍게도 면역 반응을 보인 환자의 무려 87.5%가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제약 없이 일상생활을 하며 살아있습니다.
이 데이터가 처음 발표됐을 때 종양학계 전체가 진짜 충격에 빠졌었습니다. 항암 치료의 그 긴 역사를 통틀어봐도 말기 췌장암 환자군에서 이런 장기 생존 데이터가 나온 건 정말 전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생명 연장이 아니라 그 암세포가 사실상 활동을 완전히 멈춘 상태가 장기간 지지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암 백신은 기존 항암 치료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접근법입니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고 나서 자신감에 찬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1971년 “수년 내에 암을 정복하겠다”며 암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 이후 인류가 암이라는 이 끔찍한 질병과 싸워왔던 실패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기존의 암 치료는 외부에서 암세포를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에 집중해 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외과적 수술을 통해 종양 덩어리를 도려내거나, 독성 항암제 및 방사선을 사용하여 암세포를 공격하는 화력전 방식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진 미세한 암세포까지 완벽하게 제거하는 데 한계가 있으며, 재발 위험을 완벽히 차단하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구멍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 할 암 백신은 외부에서 무기를 들여와 암을 죽이는 방식이 아니라, 내 몸의 면역 체계가 암세포를 스스로 인식하고 기억하게 만드는 정보 전달 시스템입니다. 환자의 정상 세포와 암 조직을 비교하여 암세포에만 있는 유전적 오탈자를 찾고, AI 기술을 통해 면역 세포(T세포)가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추출합니다. 암세포를 ‘적으로 기억’하고 스스로 공격하도록 프로그래밍하는 맞춤형 정보 전달 시스템입니다.
어제까지 내 몸에서 묵묵히 일하고 영양분도 공유하던 아주 정상적인 세포가 유전자 돌연변이 때문에 갑자기 무한 증식하는 괴물로 돌변한 내부의 배신자가 암입니다. 우리 몸에는 원래 바이러스나 세균을 알아서 죽이는 T세포라는 아주 강력한 면역 특수부대가 있지만, 암세포가 “나도 원래 같은 편이야” 하면서 정상세포와 완전히 똑같은 단백질 신호를 보내면서 위장을 합니다. 똑같은 아군복을 입고 위장을 합니다.
T세포가 암세포를 적이라고 인식하려면 암세포 표면에 튀어나온 돌연변이 단백질의 입체 구조가 티세포 수용체와 자물쇠와 열쇠처럼 딱 물려야 합니다. 돌연변이가 수백만 개인데 AI가 그 중에서 티세포와 가장 결합력이 높은, 그러니까 면역계를 가장 강력하게 자극할 수 있는 상위 20개에서 30개의 핵심 표적만 골라내서 그 정보를 T세포에 입력하는 겁니다.
비유를 하자면 마치 경찰서에서 수천 장의 CCTV를 다 돌려보고 분석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흉터나 문신을 가진 범인의 몽타주를 그려내는 것과 똑같습니다. AI가 설계한 암세포의 몽타주 정보를 mRNA라는 아주 얇은 염기 서열 형태로 합성해서 환자의 몸에 주입하는 면역 체계에 정보를 입력해 해결하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입니다.
다만, 환자마다 다른 암세포 특성으로 인한 개인화의 어려움, 분석에 소요되는 시간, 높은 비용, 그리고 엄격한 FDA 승인 과정 등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맞춤형 암 백신을 하나 만들려면 환자의 종양을 떼어내고 염기 서열 분석하고 AI로 항원 예측한 뒤에 mRNA나 DNA 플랫폼으로 제조해서 다시 투여하기까지 최소 4주에서 8주가 소요됩니다. 지금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속도전을 치르고 있는 말기 환자에게 한두 달이라는 대기 시간은 가혹함을 넘어서 치명적입니다.
게다가 완벽해 보였던 AI 예측 모델에도 아직 맹점이 있는데, AI가 결합력이 엄청 높을 것이라고 예측한 신생 항원 중에서 실제로 몸 안에 들어갔을 때 의미있는 티세포의 공격 반응을 이끌어 내는 비율이 아직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또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위해 단 한번 공장을 돌려서 만드는 맞춤형 약이니까 비용도 최소 수억원에 달합니다. 이러한 데스밸리를 뛰어넘어 암 정복에 이어 다른 질환도 정복하는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양주예쓰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