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14년, 또 한 번 피의 숙청이 일어났다. 내란을 빙자한 친위 쿠데타다. 기묘사화는 ‘사림의 비극’이자 ‘중종의 교활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참사다. 조광조의 죽음 이후에도 중종은 끝내 정국을 안정시키지 못했고, 대신 책임을 신하에게 전가하는 통치를 선택했다.
기묘사화는 외견상 훈구파와 사림파의 권력 투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중종의 정치적 계략이 드러난다. 중종은 결코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다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방식으로 권력을 운용했을 뿐이다.
조광조를 버릴 때도 중종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직접 칼을 들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신하들 상호 간에 고발하게 하고, 그 결과를 ‘민심’이나 ‘법의 결단’으로 포장했다. 왕권은 지키되 피는 남의 손에 묻게 하는 방식이었다.
기묘사화는 그 전형이다. 남곤의 권력과 공포 정치를 막후 조정했다. 왕은 언제나 결정적 순간에 한발 물러서 있었다.
문제는 이런 통치가 국가를 더 추악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중종은 개혁을 밀어붙일 결단도, 기득권을 제어할 용기도 없었다. 대신 숙청으로 균형을 맞추려 했다. 이는 정치가 아니라 책임 회피형 관리였다.
사화에 중독된 조선에서 충성은 위험했고, 침묵은 생존의 비겁함이 됐다. 정치가 도덕을 잃자 국가는 활력을 잃었다. 기묘사화는 “나는 몰랐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선 권력의 초상이다. 역사는 안다. 모른 척하는 것이 가장 교묘한 정치 기술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묘사화는 단지 조선의 옛 이야기가 아니다. 책임지지 않는 권력, 칼을 빌려 쓰는 지도자의 교활함은 현대 독재 국가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