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박탈하며 조선 강탈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 통수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데 이어 사법권마저 강탈해 식민지 침략 로드맵을 완성했다.
일제는 러일전쟁 중 친일 내각 수립을 통해 입법·행정권을 장악하고 사법권까지 박탈함으로써 조선을 전체주의적 독재의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사법권 박탈은 일제의 조선 통치와 국권 침탈의 초핵심 키워드였다. 사법권 장악은 식민 통치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시발점이 됐고, 치욕의 기유각서는 조선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이 장악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후 법원과 감옥 관리 권한은 일본 관리들의 손에 놀아났다.
<순종실록> 순종 2년(1909) 9월13일 기사를 보자. “법부(法部)에서 내란범(內亂犯) 이인영(李麟榮)을 교형(絞刑)에 처하는 안건을 상주하니, 제칙(制勅)을 내려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여기서 ‘내란범’으로 규정된 이인영은 정미의병을 일으켜 13도 창의군 총대장으로서 서울 진공작전을 지휘한 애국 의병장이다. 그러나 친일 내각은 정미의병을 ‘내란’ 프레임으로 몰았고, 결국 이인영 장군은 내란범이라는 모욕을 안은 채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반면 일본의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은 ‘법’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받았고 조선 땅을 자유롭게 활보했다. 나라를 강도질한 이토 히로부미 일당은 조선 통감부의 수뇌부를 차지하며 식민 지배를 공고히 했다.
일제는 이처럼 항일 투쟁을 재판과 특별법으로 난도질해 ‘내란’으로 둔갑시켰고, 입법과 행정을 독점한 날강도 독재는 사법부의 비호 아래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다. 그로부터 1년 뒤 조선은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가 됐고 친일파는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것이 조선 망국의 비극적 최후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