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죄인 조병갑(趙秉甲)에 대하여 신문 조목을 다시 만들어 엄하게 형장(刑杖)을 쳤으나 한결같이 말을 꾸며대면서 끝내 사실대로 고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신(拷訊) 기한이 다 된 다음에 다시 엄하게 형장을 쳐서 기어이 진상을 알아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고종이) 전교하기를, “이 죄수는 단지 횡령하는 죄만 범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학대한 일도 많아서 남도(南道)의 소요가 점점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심상하게 처리하여서는 안 된다. 다시 엄하게 한 차례 형장을 치고 속히 원악도(遠惡島)에 안치(安置)하는 형전을 시행하여 당일로 압송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31년 5월4일 기사다.
조병갑은 동학농민운동의 원흉이다. 한민족 5천년 역사 속 최악질 탐관오리 중 최상급이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다. 민심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갖은 폭정에 폭발해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이 무장봉기했고, 친정사대 민씨 정권은 청군의 개입 요청을 했고,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터졌다. 일개 최악질 철면피 탐관오리의 폭정이 한반도의 역사를 뒤바꾼 나비효과라고나 할까? 하지만 고종은 양두구육 마키아벨리스트였다.
<고종실록> 고종 32년 7월3일 기사를 보자. “법부(法部)에서 6월27일 조칙(詔勅)에 의하여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의 죄인들인 민영준(閔泳駿), 조병식(趙秉式), 민영주(閔泳柱), 민형식(閔炯植), 김세기(金世基), 민병석(閔丙奭), 이용태(李容泰), 김문현(金文鉉), 이용직(李容直), 조필영(趙弼永), 조병갑(趙秉甲)(중략) 외 260명을 방송(放送)하자는 뜻으로 아뢰니, 제칙을 내리기를, ‘좋다’ 하였다.”
죄수 조병갑을 불과 1년 만에 사면했고, 6개월도 채 안 지난 이듬해 1월에 법부 민사국장에 임명했다. 고종 입장에서는 전봉준을 내란 수괴로 삼고, 동학농민운동을 민란으로 진압해 종결되자 원인제공자 조병갑 등을 사면 복권시켜 지지층을 달래고 결집시킬 정략적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후 조병갑은 승승장구했다. 곧바로 고등재판소 판사, 1904년까지 고위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특히 아이러니하게도 1898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서울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될 때 조병갑은 고등재판소 판사였다. 조선이 망한 후까지 천수를 다 누린 조병갑과 그 후손들은 일제시대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 유발자 조병갑과 그를 사면한 망국 우두머리 고종을 보면 ‘불의가 정의를 이긴다’는 불쾌한 역사의 한 단면이 떠오른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