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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운 뒤의 자괴감, 그리고 어떤 배웅
  2026-09-09 09:32:26 입력

경기도 북방의 조그만 신도시. 도농복합지역이라 말이 도시이지 논밭에서 일하시는 노년층이많은 동네에 붙어서 매일 관절과 척추 통증을 안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마주합니다.

어느 날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단골 80세 할머니. 3개월에 한 번 관절약과 소염진통제를 타러 오시는 분이지만, 의자에 앉자마자 온몸의 통증을 하소연하기 시작합니다. “다리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다”, “어깨와 목이 아프다”, “허리가 우리하게 쑤신다”며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정형외과적 진단명으로 딱 떨어지는 정밀한 증상이라기보다는 평생 몸을 구부려 일해온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인생의 푸념에 가깝습니다. 30여년 간 정형외과 의사로, 그리고 중소병원을 운영하는 원장으로 단련된 몸이지만 ‘비즈니스용 미소’ 뒤편으로 스멀스멀 피로감이 밀려옵니다.

이미 엑스레이상으로는 심한 퇴행성 관절염 외에 당장 수술이나 특수 시술을 할 단계는 아니고, 의학적으로 해줄 수 있는 명확한 처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이 들어서 연골이 다 달았고, 디스크에 협착증이니 그냥 사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저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관절 주변 초음파 검사나 간단한 물리치료를 권하고, 큰 수술이나 처치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확인을 시켜드린 뒤 혈액순환 개선제, 소염제, 진통제를 쥐여드립니다. 환자는 손에 무언가 처방전이나 물리치료 안내서가 쥐어져야 비로소 안도하고 병원 문을 나섭니다.

사실 제가 건넨 것은 정통 정형외과적 수술이나 근본적인 치료라기보다 마음을 달래는 플라시보(가짜약)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제가 의대에서 배운 원칙대로 “구조적 이상은 나이 탓이니 약만 드시고 가라”고 하면 환자는 서운해하고 때로는 화를 냅니다. 반대로 적당한 설명과 간단한 검사, 그리고 물리치료와 약 한 봉지를 건네면 진료실엔 평화가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일상이 반복될 때마다 병원장이자 의사로서 괴리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내가 아는 의학의 기준대로 소신 진료하지 못하고, 환자의 마음을 맞추기 위해 뻔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법적인 탈을 쓰고 의학이라는 정보의 우위를 이용해 병원 운영을 위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청운의 꿈을 품고 수술용 메스에 날을 세우던 전공의 시절에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풍요 속의 빈곤이자 서글픈 자괴감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굴레 같은 일상과 회의감 속에서도 문득 내 마음을 울리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며칠 전, 병원 로비를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 남성을 만났습니다. 퇴행성 관절염과 척추관 협착증으로 고생하시다가 척추 내시경 수술을 받고 조금 나아져서 매번 협착증 약만 타 가시던 단골 할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원장님, 얼마 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49재 치렀습니다. 다리가 저리고 마비가 되어서 걷지 못하던 아버님을 걷게 해 주셔서 굽은 허리를 이끌고 아버지가 즐겁게 외출하시던 곳이 바로 원장님 병원이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습니다. 수많은 수술과 타인의 고통, 죽음에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저였지만, 그 아들의 정중한 인사에 할 말을 잊었습니다.

내가 매일 반복하던 그 무의미해 보이던 진료, 어쩌면 헛되게 여겨졌던 검사와 시술, 수술 등 “허리가 아프다”는 하소연을 들어주던 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타인과 소통하던 따뜻한 통로였던 것입니다. 제가 타성에 젖어 매너리즘이라 여겼던 그 진료실이, 누군가에게는 외로운 삶의 끝자락에서 거쳐간 유일한 ‘배웅의 공간’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도 주일이지만, 입원하여 병실에 발이 묶인 환자들을 회진하러 병원으로 향합니다. 여전히 나는 100% 순수한 교과서적 의학만을 펼치지 못하는 생계형 병원장이고,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환자를 달래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지겹다고 털어놓던 그 권태로운 진료와 푸념 들어주기가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마무리하는 길목에서 만난 소중한 위로였음을 기억하려 합니다. 하얀 가운 뒤에 숨겨진 숱한 고민과 애환 속에서도 회진을 하고 수술을 하며 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양주예쓰병원 원장

경기북부시민신문(hotnews24@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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