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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저항의식을 품은 우리 민족의 ‘토끼’
건강·장수·평화의 계묘년을 꿈꾸며
  2023-01-03 14:59:41 입력
십이지신의 ‘묘신’.

#재앙을 물리치고 장수를 주던 토끼
육십갑자에서 40번째에 해당되는 토끼해, 계묘년(癸卯年)의 태양이 떠올랐다. 토끼는 싸움을 싫어하고 주변의 동물들과 잘 지내는 온순한 동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사납게 공격하고 물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토끼는 아주 오래 전부터 참으로 다양한 면을 우리에게 보여준 동물이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그렇지 않을까? 알려지거나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내재되고 감춰진 진짜 자신의 성향을 잘 지켜낸다면 우리의 민족이 토끼처럼 자유롭고 다양한 삶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전통을 통해 그려내는 토끼의 다양한 모습은 주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수많은 제목을 가질 정도로 유명한 <수궁가>뿐만 아니라 서울 화계사 나한전에는 백호에게 담뱃대를 건네는 토끼, 순천 선암사 원통전 출입문에는 보름달에서 방아를 찧는 토끼 한 쌍이 있다. 김제 금산사 보제루에는 건물을 받치는 토끼 한 쌍과 여수 흥국사 대웅전 축대 위에는 돌 토끼가 앉아 있다. 경북 문경에는 토천(兎遷)이라는 곳이 있는데, 고려 태조가 길을 잃어 헤매고 있을 때 토끼가 나타나 절벽을 따라 뛰어가며 길을 안내했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으로는 장수와 재물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세시풍속과 민간신앙 속에 자리 잡기도 했다.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에는 새해 첫 토끼날 새로 뽑은 실을 주머니 끝에 달아 재앙을 물리치고, 명주실을 청색으로 물들여 팔이나 옷고름, 문돌쩌귀에 걸어두고 장수를 빌었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토끼의 재능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조선시대 민화.

#달 속의 토끼, 꿈 속의 토끼
밤하늘 둥근 달을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계수나무 아래서 떡방아를 찧는 옥토끼가 아닐까? 고구려 벽화에 인간세상에서 달까지 단 한 번 뛰어서 오간다는 달두꺼비도 있지만, ‘보름달’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동물은 단연 토끼다. 도교에서는 장생불사를 표상하는데, 이런 점은 문화권이 전혀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그리스신화의 아르테미스(로마신화의 다이애나)는 달과 사냥의 여신으로, 토끼가 바로 달의 여신을 가리키는 동물이다. 나이지리아 주쿤족의 민화에 따르면 왕의 사신이자 미지의 작물이나 쇠 기술을 전하는 문화 영웅이다.

부처님의 전생을 다룬 <본생경>에서 기록된 토끼의 사연은 진심을 담은 보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노인으로 변신한 제석천이 여우와 원숭이, 토끼에게 음식을 청하자, 여우는 생선, 원숭이는 과일을 가져왔으나, 빈손으로 돌아온 토끼는 불 속에 제 몸을 던져 보시하려고 한다. 토끼의 소신공양에 감동한 제석천은 그 마음을 칭찬하며 달에 토끼의 모습을 새겨 귀감으로 삼았다.

꿈 속에서 만나는 토끼 역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를 선사한다. 토끼꿈이 재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꿈에서 토끼를 기르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토끼가 새끼를 낳으면 생산적인 일로 풀이하여 길몽에 해당된다고 한다. 사주명리학에서는 토끼띠는 생명력 강한 나무의 품성을 가졌고, 대체로 섬세하고 신중하며, 선량하고 평생 재물이 풍부하다고 한다. 특히 올해 계묘년에 태어난 사람은 다정다감하며 총명하다고 풀이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민첩하고 영민하여 임기응변에 탁월한 토끼의 기운이 충만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궁가>를 그린 민화.

#악연의 덫, 게으름인가 혹은 저항인가!
사람과 친근한 동물이 된 토끼는 세계적으로 동화나 민담 등에서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문학 속에서 만나는 토끼의 모습은 꽤나 다채롭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작고 왜소한 토끼가 의로우면서도 영특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용궁의 자라가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토끼를 용궁으로 데리고 갔는데, 꾀를 낸 토끼가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 돌아온다는 <수궁가>에서는 기지와 지혜의 존재로 대표된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판소리계 우화소설이자 풍자소설인 <수궁가>는 대략 100여종의 이본이 전한다. 이중 한글 및 국한문 혼용 필사본이 78종이나 되는데, 서민의식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풍자와 익살스러운 해학이 살아있다. 지배 관료층의 부패와 무능으로 서민들의 사회적 불만이 커가던 17~18세기에 성행한 작품이니, 지배층에 대한 서민계층의 저항의식이 표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용왕을 정점으로 한 자라와 수궁대신들의 용궁 세계는 지배 관료층의 세계, 토끼를 중심으로 한 여러 짐승들의 육지 세계는 서민 피지배 농민층 세계를 반영한다. 주색에 빠져 병든 용왕, 싸움만 하는 수궁대신들은 당시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을 투영했고, 자라에게 속아 죽기 직전에 이르지만 용왕을 속이고 자라를 조롱하는 토끼는 서민의 입장이다. 

민담 ‘영리한 토끼와 어리석은 호랑이’에서는 꾀 많고 영리한 토끼가 구덩이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은혜를 저버린 호랑이를 다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게 하거나, 약한 동물들을 괴롭히는 호랑이의 꼬리를 불태우는 방식으로 골탕 먹이는 상당히 의로운 동물로 등장한다. 봉건사회에서 고약한 양반과 탐관오리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서민의 한을 이렇게 풀어낼 수밖에 없었으리라.

캘리그라피 수묵화 토끼 일러스트 연하장, 김희영 작.

#신과 자연계 질서에서 자유로운 트릭스터
이렇게 신과 자연계의 질서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리하면서도 교활하고, 선하면서도 악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캐릭터를 트릭스터(trickster)라고 하는데, 악당인 것 같기도 하지만 악당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주로 도깨비나 여우가 맡는다고 하지만, 토끼 역시 대표적인 트릭스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토끼마저 때로는 지혜와 저항정신을 잊는다. 놀란 토끼 같다, 토끼가 제 방귀에 놀란다는 소심함과 스스로 겁을 집어먹는 속담처럼 작고 부드러운 생김새와 신중하고 망설이는 움직임 때문인 것은 아닌가 싶다. 속임수의 명수, 지혜와 풍요의 상징인 토끼에게서도 마냥 방심할 수 없는 이유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세상 사람들을 힘겹게 만든 코로나19뿐만 아니라 전쟁과 경제 악화,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안타까운 사망사고까지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다재다능한 토끼의 기운이 듬뿍 오르는 계묘년에는 이 모든 일이 정리되고,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토끼해에 맞게 평화롭로 안락한 한 해가 되면 좋겠다. 또한 만약을 위해 굴을 세 개 파둔다는 토끼의 ‘토영삼굴(兎營三窟)’처럼 항상 조심하여 허물과 액운을 줄이는 2023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국립민속박물관 ‘새해, 토끼 왔네’ 특별전.

 

이재희 기자(hotnews24@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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