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무엇인가?” 대답이 어려운 질문이다. 그럼에도 “삶이란 무엇이다! 그러하니 이렇게 살아라!”라고 자신 있게 가르치려 덤비는 책들은 무수히 널려 있다. 서로 서로 베껴서 이제는 그 내용들조차 말 그대로 대동소이한 수많은 짜깁기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들이 여전히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음은,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많은 이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함부로 독자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감히(!) “삶이란 이런 것이니 이렇게 살도록 하여라”는 설교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다만,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질문 자체를 읽는 이들에게 제시할 뿐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질문을 풀어서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바로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
줄거리는 단순하다. 크레타로 가는 배 안에서 화자인 ‘나’는 우연히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난다. 첫 눈에 조르바를 마음에 들어한 ‘나’는 갈탄 광산 운영을 그와 함께 하기로 하고, 두 사람의 크레타 생활이 시작된다. 낮에는 갈탄을 캐고 밤에는 포도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일상을 차분하게 펼쳐내는 소설은, 중간 중간 오르탕스 부인, 마을의 과부, 롤라, 마놀라카스, 미미코, 자하리아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의 에피소드를 보여주며 독자에게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두 주인공인 ‘나’와 ‘조르바’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화자인 ‘나’는 금욕적인 불교 신자이자 이상주의적 지식인의 표본이다. 끝이 없는 고뇌와 번민 속에 참다운 삶의 길을 찾으려는 ‘나’는 매일 밤 포도주와 함께 하는 조르바와의 대화에 빠져들며 조금씩 그를 닮아가고 싶어 한다.
반면 하루하루, 매 순간순간을 즉흥적으로 사고(思考)하며 사고(事故)를 치는 조르바는 만사에 거침이 없다. 차라리 광기에 가까운 지경인 그의 자유분방함은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정도를 초월해 있다.
질그릇을 만드는 데 푹 빠진 나머지 물레를 돌릴 때 왼손 검지가 자꾸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자신의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버리는가 하면, 조국 그리스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산적패에 가담하여 남녀노소 불문하고 불가리아인, 터키인들의 목을 땄던 무용담을 서슴없이 지껄이고, 그동안 동침했던 여자들의 체모(體毛)를 모아 베개를 만들어 썼던 일화를 자랑스레 선보인다.
상식을 벗어난 그의 기행(奇行)은 소설 속에서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언뜻 미치광이로만 보이는 조르바의 ‘아무렇게나, 내 마음대로’ 삶에는 분명한 주관과 철학이 스며져 있다. 소설 속 조르바의 반짝 빛나는 어록(語錄) 중 일부만 살펴보아도 알 수가 있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들을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쇼.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 해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 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법이지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브레이크를 써요. 그러나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일견 방탕과 방종으로 보이는 조르바의 삶은 두 가지에 철저히 충실해 있다. 바로 ‘순간’, 그리고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결국 삶이란 이 둘의 결합이다. 자신의 존재가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한 것은 오직 이 ‘순간’뿐이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외계’라고 본다면 ‘삶’이 존재하는 영역은 ‘자기 자신’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 하나의 존재가 위치해 있는 것이며, 그 가장 미세하고 정확한 좌표는 ‘순간’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의 교차점에 완전히 몰입하는 경지가 바로 순수한 ‘자유’가 아닐까.
절대 조르바의 삶이 정답은 아니다. 작가 역시 조르바의 모습과 그에 동화되어 가는 ‘나’의 변화를 보여주기만 할뿐, 독자에게 가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르바의 일부 행태는 법규와 도덕을 외면한 무규범 상태의 연속이며 이기주의의 극치를 넘어선 동물적 본능에의 충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르바의 독특한 철학과 인생관은 그저 본능과 무규범이라고만 비난하며 지나칠 수 없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
니체의 위버멘쉬(초인적 존재)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는 기존 가치들을 낙타처럼 무조건 따르지도 않고, 사자처럼 무작정 거부하지도 않는다. 조르바는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넘어서서 그 자체로 삶의 기쁨을 느끼며 순간을 철저하게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소설의 막바지, 망해버린 갈탄 광산 앞에서 모든 것을 잃은 ‘나’가 조르바와 함께 웃으며 춤을 추는 명장면은 초탈과 달관이라는 두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
또 하나 인상 깊은 페이지, 오르탕스 부인이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는 조르바의 뜨거운 눈물이 읽는 이의 눈시울도 함께 적신다. 그녀가 세상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의 담담한 묘사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독자로 하여금 독백하게 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크레타 섬의 아름다운 풍경 묘사, ‘나’와 조르바를 비롯한 다양한 군상들이 날줄과 씨줄처럼 엮어내는 사건들. 그것들이 펼쳐내는 각자의 움직임과 시선 하나하나까지, 소설의 행간 마디마디에는 바로 그 질문이 숨어 있다.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해답이 담겨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정답이 없는 해답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을 읽는 이 스스로에게 던지도록 만드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이 책을 집어 들어 첫 장을 폈던 순간의 우연은 결국 고마운 필연으로 남았다. 그리고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감사한다.
그리스 크레타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도 조르바도 지금은 영원한 자유 속에서 춤추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 누구든 결국 언젠가는 그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