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시 은현면 봉암리에 여우내라는 개울이 있는데, 개울 이름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이 개울은 비가 많이 오면 이쪽으로 났다가도 다음 해에는 다른 쪽으로 흘러가는 등 물길 세 개가 번갈아가면서 다른 방향으로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울이 변덕이 심한 여우처럼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면서 이쪽으로 흘렀다가 저쪽으로 흘렀다가 하는 식으로 잘 바뀐다고 해서 여우내라고 부른다.
여우내가 유유히 흐르는 봉암리 일대에는 고려 충신으로 알려진 남을진 선생의 행적과 연관된 지역명이 여럿 있는데, 2012년 <한국구비문학대계> 제작 작업에 은현면 봉암리 주민 남선휘씨, 남면 황방리 김상옥씨가 구술하여 그 내력이 구체적으로 전해진다.
고려말 충신이었던 사천백 남을진 선생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1368년(공민왕 17년)에 현량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 이르렀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교유했고,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양주의 사천현 봉황산에 은거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동반(同伴)이었지만, 조선 개국 이후 포은 정몽주처럼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불사이군’의 뜻을 접지 않았던 것이다. 이성계가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남을진 선생의 조카에게 모시고 오라고 하자 조카가 찾아와 그 뜻을 전했다. 하지만 남을진 선생은 변함이 없었다.
“너는 새 왕조에서 벼슬을 했으니까 괜찮지만 나는 불사이군이다.”
이렇게 거절했으나, 또 찾아와서 또 보내고, 오면 또 보내고 하면서 세 번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는지, 감악산 남선굴로 들어가 버렸다. 당시엔 그냥 이름도 없는 산중의 굴이었는데, 한 사람이 들어가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다. 그 굴에서 솔잎을 뜯어 먹으면서 지냈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지내다가 어느 날 종적을 완전히 감췄는데,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해서 굴에서 사용하던 의관과 책으로만 묘를 쓰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성계가 그 굴을 남선굴이라고 부르며 바위에 이름을 새겼다.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의관과 책을 상여로 모셔 산 아래로 내려오는데, 명정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곳이 지금 남을진 선생의 묏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서원이 있다고 하여 서원말이 생겼는데, 남씨 집성촌으로 서원동이 되었고, 현재는 은현면 봉암리 서원마을이라고 부르면서 아직도 남씨가 많이 살고 있다. 서원말 안쪽에 사천서원 정절사가 있어 유림에서 일 년에 두 번, 음력 2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내며 양주시장이 집례(執禮)를 하는 가운데 후손이 초헌(初獻)하고 유림에서 아헌(亞獻)을 드린다고 한다.
서원말 옆에는 비석골이라는 곳이 있다.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데, 여기에 대소인하마(大小人下馬)라고 새겨져 있다. 높은 사람의 묘와 사당이 있는 곳이니 임금이라도 이 앞을 지나갈 때는 말에서 내려야 했다. 정조 8년(1784년)에 정절사 사액이 내려지면서 함께 세워졌는데, 이때부터 이 지역을 비석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또 옛날에 정절사 아래쪽에 절이 있었는데, 그 길의 모퉁이를 승방(僧坊) 모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은현면 봉암리 일대에는 서원말, 비석골, 승방 모퉁이, 여우내 같은 이름이 생겨났고 지금도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는 흔히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