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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왕실’ 회암사, 날개를 달다
국내 최대 규모 회암사지 발굴…700년 유물 세상 밖으로
  2016-10-28 14:53:40 입력


개성, 평양 등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수많은 문화를 꽃피웠던 양주.

양주는 지리적 요충지이면서 종교와 문화의 핵심이었다. 왕실에서 맞아야 할 금나라 사신을 대신 맞이할 정도의 위엄이 있었고, 왕실 발원으로 수많은 불교 유적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사찰의 불을 밝히기도 한 곳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몇 백 년의 장엄한 역사가 흙으로 덮이고 숲에 가려지고 만 것이었다. 그러던 1997년, 양주의 문화 위상을 살리는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고, 보이지 않는 환영 같았던 회암사는 드디어 그 실체를 우리 앞에 드러냈다.

#19년에 걸친 발굴, 회암사지 ‘날개를 달다’

2000년이 막 시작된 어느 날, 회암사라는 엄청나게 큰 사찰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곳은 실망 자체였다. 밭 작물 너머에 파헤쳐진 흙더미와 원래 흔적을 알 수 없는 부도탑의 일부로 보이는 돌더미뿐이었다. 회암사지는 밭두렁에서 휘날리는 흙먼지만큼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린 후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곳이었다.

2016년 화창한 가을. 모처럼의 기회로 회암사지박물관을 찾아가면서 적어도 더 큰 실망은 없을 것이라는 마음뿐이었다. 그 때문이었던가. 비어있는 기대감으로 찾아간 회암사지박물관에서 ‘뜻밖의 커다란 놀람’과 마주쳤다.

지금까지 어디서도 만나지 못했던 신비로운 형태의 유물과 역사가 아주 정갈하게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회암사지박물관은 지금까지 숨겨졌던 수많은 유물을 생동감 있게 전시하고 있었고, 우리 문화유산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위대한 유물의 어엿한 새 둥지가 되어 있었다.

아주 오랫 동안 개발논리와 산업중심의 정책전략에 의해 회암사지는 버려진 문화유산의 흔적이 되어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었다. 하지만 회암사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부터 2015년까지 약 19년, 11차에 걸친 대규모 발굴작업을 거쳐 옛 흔적을 되살렸고, 그 속에서 숨죽이던 수많은 유물들은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되었다.

2층 규모의 박물관에는 전시와 행사를 위한 기획전시실, 회의 및 세미나를 위한 시청각실뿐만 아니라 교육과 모임을 진행할 수 있는 교육실도 있어서 시민을 위한 다양한 사업이 열리고 있었다. 넓은 공원으로 꾸며진 녹지를 지나면 회암사의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발굴된 회암사지가 보이고, 그 옆에는 문화해설사들이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유명한 사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유물을 품었던 회암사지와 그 속에서 꺼낸 화려하고 독창적이며, 장엄한 유물을 멋스럽게 전시한 회암사지박물관이 드디어 불을 켰다. ‘제2의 왕실’이라 불렸던 회암사는 이렇게 날개를 달고 700년의 역사를 말하며 우리 앞에 섰다.


#고궁박물관의 위상으로, 회암사지박물관


2층 규모의 회암사지박물관은 획일적으로 전시해 놓은 유물을 둘러보는 전시실이라기보다는 유물이 품고 있는 독특한 이야기를 듣는 도서관 같은 느낌의 공간이었다. 다른 박물관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문화유적 전시가 아니라 마치 물의 흐름을 따라가듯이 이야기를 타고 이어지는 생동감 때문일까.

김종임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따라 들어선 상설전시실에는 회암사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관련 기록, 1404년에 간행된 이색의 <목은집>이 중심을 잡고 있었다. <목은집>에 기록될 당시 262칸이었던 회암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고려 명종 4년(1174년)에 금나라 사신이 다녀갔다는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토대로 늦어도 12세기 무렵에는 이미 창건되었으며, 상당한 규모를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하고 궁실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해 150명을 보내 부역을 살게 했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으로 확인되는 바, 왕실 직속 원찰이었음이 확실하다. 이후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를 비롯한 왕실 인물이 불사를 후원했고, 김수온의 <회암사중창기>에 성종 3년(1472년)에 정희왕후가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왕실의 비호와 후원을 받은 최대 사찰의 면모와 위상을 갖추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회암사의 위세는 급격하게 기운 것 같다. <명종실록>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명종 21)”, <선조실록>의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선조 28)”는 기록을 볼 때, 1566~1595년 방화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멸을 누릴 것 같았던 회암사는 정치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회암사의 영광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시실의 유물들은 회암사가 가졌던 왕실문화의 찬란한 수혜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건축, 도자, 정치뿐만 아니라 사상과 신화의 변화과정까지 충분히 보여준다.


#반인반수 조형물, 잡상의 역사를 보여주다


회암사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여러 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회암사의 중심 건물이었던 보광전 터에서 발견된 금탁은 왕실 사찰이라는 위상을 증명한다. 비로자나불을 모셨던 보광전의 추녀 끝에 걸어두었던 풍경인 금탁 표면에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 무학’, ‘조선국왕(朝鮮國王, 이성계)’, ‘왕현비(王顯妃)’, ‘세자(世子, 이방석)’라고 새겨진 글씨는 왕실에서 발원한 물품이라는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왕실과 관련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정청지에서 발견된 청기와이다. 청기와는 재료조달이 어렵고 제작에 많은 비용이 들어 궁에서도 흔하게 사용하지 못했던 아주 귀한 물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근정전과 사정전에만 덮었을 뿐이고, 문소전과 종묘에도 덮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청기와가 사찰인 회암사에서 발견되었으니, 그 장소 즉 정청이 바로 궁궐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전시실에서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조형물이다. 지붕의 추녀마루에 올라가는 토수, 용두, 잡상과 같은 장식이 다량 출토되었는데, 이는 궁궐 중심의 건물에 올려놓았던 조형물이다.

이 중에서도 유난히 특이한 것이 잡상이다. 잡상은 무장형, 동물 모습의 반인반수, 그리고 말과 새 등 동물형 같은 다양하고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바로 조선 초기의 유일한 잡상이다. 현재 경복궁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상은 수호지의 등장인물로 세월이 지나면서 계속 변화를 겪었기에 초기에 만들어 올렸던 잡상의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역사적 가치는 더욱 커진다.

이외에도 왕실에서 사용했던 분청사기 등의 자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당시 청동으로 흔히 제작됐던 시기에 국가에 헌납한 것으로 추정되는 분청사기 향완이 발견됐으며 백자, 중국 명대의 청화백자도 출토됐다. 또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제작된 다양한 종류의 무늬와 형태를 가진 기와도 나왔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계에서 환생과 재생의 의미로 오랫 동안 연화문이 애용되었는데, 회암사에서 사용된 연화문 기와는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도안화된 형태도 보인다. 특히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기와에서는 태조 6년(1397년), 세종 16년(1434년)과 세종 18년, 세조 6년(1460년), 성종 1년(1470년)에 왕실이 관여하여 회암사를 중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종교적 의미에서 천상의 꽃을 도안한 화문기와와 고려 후기의 특징을 대표하는 범자문 기와도 발견돼 범자문 전통이 조선 전기까지 이어졌음이 확인된다. 상상의 동물이자 왕권을 상징하는 용을 사용한 용문기와와 상서로운 동물로 왕비에 비유되기도 했던 봉황이 새겨진 봉황문기와도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다만 사찰에 당연히 있어야 할, 보광전에 모셔졌을  비로자나불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폐사된 지 수백 년이 흘렀으니 다른 절에 모셔져 있을지, 아니면 영원히 사라지는 수모를 겪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단지 네모진 얼굴로 수인을 결하고 있는 6.5㎝ 정도의 작은 금동불입상과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파손된 석조불상, 다수의 소조불상이 출토되었을 뿐이다.


#조선 최대 사찰이자 태상왕 이성계의 궁궐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까지 기나긴 시대의 유물을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회암사지는 단지 사찰 유적발굴 그 이상이다. 회암사는 조선 왕실의 ‘제2의 궁궐’이었다. 그로 인해 왕실유적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기에 회암사지박물관은 사찰에서 만든 성보박물관이 아니라 ‘고궁박물관’으로서의 가치가 훨씬 크다고 볼 수 있다. 즉 왕실사찰이라는 점에서 불교와 건축, 문화, 정치적인 가치를 한꺼번에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김동규 박물관 팀장의 안내로 회암사지 앞에 서자 엄청난 규모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일주문에 서서 회암사지를 바라보면 산새의 흐름을 타고 내려와 안락한 땅에 자리 잡은 옛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당간지주와 엄청난 크기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괘불대가 좌우에 자리하고 지공선사와 나옹선사, 무학대사 등 회암사를 지키던 위대한 스승들을 기리는 부도, 탑, 비, 석등이 회암사의 위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석축을 쌓아 8개 단지로 구성된 회암사지는 크게 두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앞부분은 거주와 식생활에 필요한 생활공간으로 활용했고, 보광전과 같이 사찰의 주요영역을 차지했던 건물은 뒤쪽에 모여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동구간에 깔린 박석을 따라가면 일주문-중문-사문-정문지를 지나 보광전과 설법전, 사리전지를 거쳐 제일 위쪽이자 가장 북쪽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자리했던 정청(政廳)지를 볼 수 있다. ‘청’은 궁의 건물에만 붙이는 글자이고, 이 곳에서 청기와가 발견돼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던 장소로 추정된다. 정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방장은 궁궐의 편전과 침전의 배치형식과 같아 왕실사찰과 정치적인 공간이 결합된 특징을 잘 보여준다.

건물이 있었던 자리를 발굴할 당시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온돌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건축양식의 가장 큰 특징인 온돌시설이 대규모로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ㄷ자 평면이 마주하는 특수한 형태의 탁상 온돌도 발견되기도 했다.

해우소는 분뇨저장시설을 갖춰 별도의 출입구를 통해 오물수거를 했는데, 이것은 사찰 해우소 중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한다. 또 골짜기의 물길을 끌어와 세 줄기의 수로를 만들어 사찰의 지하와 지상으로 흐르게 해 풍요로운 경관까지 만들어내고, 필요한 곳에서 적절히 사용한 지혜도 엿볼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을 꿈꾸며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이코모스(ICOMOS, 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d Sites)의 세계문화유산 한국전문기관 이혜은 교수가 다녀갔다고 한다.

김종임 학예연구사는 “이 교수가 문화재청 세계문화유산 담당자로서 회암사지 발굴현장과 유물을 살펴보고 등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말을 했다”며 “까다로운 절차와 다른 지역에서도 등재를 원하는 곳이 많아 경쟁이 치열하지만, 우리 회암사지와 유물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꼭 등재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오는 11월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기획으로 양주민속문화를 선보이는 ‘큰고을 양주’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회암사지 개방과 더불어 양주가 가지고 있는 풍요로운 700년 문화가 드디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간다.

양주는 역사의 도시다. 남한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인 보루 60개 중 25개가 양주에 있을 정도다. 독특한 문화유적을 보유한 ‘문화 양주’의 실체가 드러나는 일만 남았다.

2016-10-28 15:09:55 수정 이재희 기자(hotnews24@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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