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사건은 1885년(고종 22) 3월1일부터 1887년 2월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외세 침략의 역사다.
19세기 후반, 일본과 청나라는 우리 조선을 놓고 각축전을 벌였다. 하지만 한반도는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열강들까지 눈독을 들여 동북아의 화약고가 됐다. 특히 러시아는 크림전쟁 이후 침략의 방향을 태평양 진출로 변경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1884년 조·러 통상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외교의 귀재인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뛰어난 외교술로 조선 정부 내부에 친러파를 키웠다. 조선도 청나라의 지나친 간섭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청 견제용으로 러시아를 새로운 파트너로 삼았다.
문제는 영국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갈등상태였다.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받는 아프가니스탄군과 러시아군이 충돌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반도에서도 영국과 러시아는 일촉즉발의 위급한 대결상태였다. 영국은 세계 최강국답게 선제공격에 나섰다. 영국은 1885년 3월1일 갑자기 세 척의 동양 함대를 파견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영국은 이 군사적 행동이 러시아의 조선 점령에 대한 예방조처라고 설명했지만 조선은 영국의 침략을 막을 힘이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조선은 약소국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꼈다.
거문도는 러시아 동양 함대의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국군은 자국기를 게양하고 포대와 병영을 쌓는 등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영국군은 수뢰를 부설하고 급수로와 전선을 가설하는 등 마치 조선을 자국의 식민지처럼 취급했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의한 지루한 외교협상이 진행됐다. 2년의 세월이 지나 청의 중재로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자 영국군은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그 때가 1887년 2월5일이었다. 불행히도 조선 정부는 이틀이 지난 2월7일 철수 소식을 들을 정도로 사건 초기부터 끝까지 철저히 배제되는 수모를 겪었다.
거문도 사건은 조선이 허울 좋은 독립국이고, 열강의 침략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약소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막지 못하는 우리는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부끄러운 역사인 거문도 사건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북한 핵실험에 미국과 중국 틈새에 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