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올해 병역명문가 증서를 받게 된 영광은 조혼한 덕분이라 생각한다.
1950년 2월14일 부모님들의 결정에 따라 중학교 5학년 때 결혼을 했다.
그것은 연로하신 할아버님의 간곡한 소원이 죽기 전에 손부를 보시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해 6.25사변이 나고 전쟁 중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극도로 불리해져 후퇴하던 12월13일, 학도병으로 방위군에 입대하기 위해 수십 명의 학생이 인천으로 배를 타고 도강을 했다. 그리고 1951년 1월2일 제주도로 가서 방위군에 편입되었으나 아무런 보급품도 없이 입고 피난 나온 그대로의 의복과 주먹밥으로 훈련을 받다가 51년 2월12일 육군훈련소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1개월 훈련을 마치고 보충대로 왔을 때 마침 통신학교에서 보급행정과 요원이 필요하다고 50명을 선발할 때 나도 선발되어 속성으로 1개월 교육훈련을 마치고 통신야전창고 중대로 배치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그때 고향에 남아있던 나의 처가 몰래 교동으로 도강하려다 인민군 초병에게 발견되어 총상을 입고 탈북은 좌절했지만 다행히 허벅지만 관통상을 입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도전하여 53년 휴전 직전에 교동을 거쳐 인천에 사는 친척 집에 와 군에 있는 나에게 연락이 와서 재회할 수 있었다.
나는 54년 10월에 3년 8개월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하여 피난살이 가정이 시작되었고 그해 12월에 체신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것이 38년 공직 생활을 끝으로 정년퇴직하고 보니 나는 38과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즉, 38선을 넘어왔고, 군 생활을 3년 8개월을 마치고 공무원 생활을 38년을 근무했으니 말이다.
적수공권(赤手空券)으로 피난 와서 2남 2녀를 두고 손자 손녀까지 21명의 대 가족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다행히 한 명의 손실도 없이 건강하게 성장해서 아들 2명과 손자 3명뿐 아니라 사위 2명과 외손자 3명도 모두 병역 의무를 마치고 군에서 제대하였기 때문에 병역명문가 신청을 할 수 있었다.
나의 80평생 살아오면서 생활신조가 지족상락(知足常樂)으로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알면 항상 즐겁다는 것이다.
자손들에게는 늘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라고 당부했지만, 자식들이 원하는 아버지는 못 되었을지 몰라도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아왔다는 것은 자식들도 알 것이다.
공직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정년 퇴직 후 현재 나의 생활은 바쁘게 봉사하며 활동하고 있다. 우선 실버경찰과 6.25 참전 유공자 그리고 아파트 동 대표와 노인회 감사로 일하고 있으며 여가로 게이트볼 분 회장을 맡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포상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1974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무관 임명장 수여와 1993년에 김영삼 대통령의 녹조근정훈장을 수여했고 2012년에 이명박 대통령의 국가 유공자 증서를 수여했으며 그 외도 체신부장관상과 고양시장의 청소년 선도표창과 파주시장의 노인의 날 모범시민 표창과 2015년도 병무청 3대 가족 모두 병역의 의무를 이행한 병역명문가로 선정된 것이다. 경기북부병무지청장이 집으로 직접 방문하여 인증패를 전달해 줘서 나에게는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행복한 가정을 물려주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모두가 따라왔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끝으로 여생 다하기 전에 65년 동안 생사도 모르고 살아온 부모·형제와 고향을 그리는 마음 하루빨리 통일이 되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