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입법을 위한 연구? 상임위원회 활동 또는 회의? 미국의 법학자인 레식(Lessig)에 따르면 미 의회의원들과 후보자들은 30%에서 70%의 시간을 정치자금 모금에 보낸다고 한다. 이 통계가 우리나라에도 들어맞는다면 정치인들은 당신이 궁금해 하는 바로 그 시간에 대개 정치자금 모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입법자들이 예산·결산 심의와 입법을 위해 고군분투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정치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 하는 그 시각에 정치자금 모금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미국과 우리의 정치제도가 다소 상이하므로 그 비율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 모금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해 진다.
정치인은 자신의 주장과 정책을 우리에게 알리고 우리는 그 정책을 보고 후보에게 투표한다. 그리고 당선된 정치인은 자기 뜻을 맘껏 펼치며 정치활동을 한다. 근데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정치자금! 미국 하원들이 정치자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금력이 있어야 자신을 알리는 데 유리하기도 하지만 입법을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하고 이에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A의원이 열심히 정치자금을 모은다. 모금활동에 자신의 70% 시간을 소비한다. 그리고 30% 시간을 이용하여 입법에 힘을 쓴다. 그런데 A의원의 정치자금 모금 시간을 줄여주는 큰 손 B가 나타난다면 그리고 B의 후원금이 A에게 계속 필요하다면 적어도 A의원은 B의 이익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기 힘들 것이 자명하다. 깨끗한 정치란 외압으로부터 특히 금권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외압 없는 정치자금을 모을 것인가.
2008년 미국 코네티컷주에서는 정치자금 관련 실험적 제도를 시행한 적이 있다. 주의회 후보자들에게 소액다수기부의 공공정치자금(full public financing)을 받을지, 다액소수의 정치자금을 받을지 선택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치인들은 그 총액이 더 적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정치자금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이 제도가 시행된 후, 첫 해에 주 하원의원 후보의 78%가 더 큰 금액을 포기하고 소액의 공공정치자금만 받았다.
투명한 정치자금 조달로 부정부패의 연결고리가 끊기는 대목이다. 흔히 정치인들은 부정부패 유전자가 있다고 생각해 왔으나 이는 그 주장의 반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코네티컷주의 이 혁신적인 제도는 그 유사한 형태로 이미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있다. 정치자금 기탁금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정치자금법상 정치자금 기탁금은 정치인들이 합법적으로 자금을 확보하게 하여 건전한 민주정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깨끗한 정치를 바라는 국민 개개인은 누구든지 1만원 이상 연간 1억원(또는 전년도 소득의 100분의 5 중 다액) 이하로 각급 선거관리위원회에 정치자금을 기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탁금은 기탁자의 의사에 따라 특정인에게 배분될 수 없어서 직접 특정 정치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차단되어 있다. 기탁금은 정치인 개개인에게 배분되지는 않고 국회의원 의석비율 등을 따져 정치자금법에 정해져 있는 비율대로 각 정당에 배분된다. 또한 이렇게 모금되어 배분된 정치자금은 정기적 회계보고 및 정치자금조사를 통하여 그 지출을 투명하게 하도록 담보하고 있다.
유권자 1만명이 1만원씩 마련해 준 1억원과 부자 1인의 1억원의 값어치는 다르다. 전자는 정치인에게 자유와 소신 그리고 힘을 주며 후자는 정치인에게 구속과 부담을 줄 것이다. 국민들의 정치자금 기탁이 깨끗한 정치의 시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