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락호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파락호란,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을 온통 말아먹은 난봉꾼을 이른다. 상갓집 개라, 궁도령이라 불리던 흥선대원군이 그 파락호의 하나다.
그의 가문은 쇄락한 왕가 후손이었는데, 대원군의 아버지가 소싯적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에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리하여 남연군이 된다. 자연히 그는 추사 김정희와 이종사촌간이 되었다. 추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남양 홍씨와 은신군의 양어머니인 남양 홍씨는 자매간이었던 것.
남연군은 직접 네 아들을 가르쳤는데, 그 중 넷째가 흥선군이다. 하여 그는 이 넷째를 추사 김정희 문하에 보내게 된다. 외당숙인 추사가 흥선군의 스승이 된 것이다. 훗날 유명한 흥선의 석파난 역시 추사 문하에서 닦은 것이다.
때마침 정조의 대가 끊어짐으로써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아졌다. 그래서 그 파락호가 가문을 일으킬 꿈을 꾸었다.
우선 그는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풍수가들이 길지라 일컬은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 중턱의 석탑(石塔)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고려시대의 사찰인 가야사를 불태웠다. 후일 고종은 그 덕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여 가야산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웠다.
흥선군이 이건창에게 해준 말에 의하면, 석탑을 해체하는데 백자 2개와 단차 2병, 사리구슬 3매가 나왔다고 한다. 단차 2병에는 용설승단차가 각각 2덩이씩 4덩어리가 담겨 있었는데, 이는 송나라 휘종황제 때 중국에서 법제한 700년이나 된 귀한 차이다. 이중 한 덩어리를 흥선군이 차 매니아인 이상적에게 선물한다. 아시다시피 이상적은 추사의 제자로서 추사가 세한도를 그려준 장본인이다.
후일 추사는 바로 이 용단승설차 한 덩이를 얻는다. 추사의 이 소룡단이 이상적이 주었는지, 흥선대원군에게 얻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아무튼 함경도 북청 유배길에서 돌아오자마자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한 장의 편지를 띄워 이 기이한 보물을 즐기자고 청한다.
초의가 추사를 찾아 그 소룡단을 먹어보았는지 모른다. 추사가 또한 다산을 청해 그 차를 나누었는지도 모른다. 아시지 않는가? 추사와 다산이 얼마나 막역했는지. 또한 초의는 다산의 제자된 연이 있고, 이들이 가까이 모시던 해거재는 바로 초의가 동다송을 지어 올린 분이 아닌가?
묘한 일이다. 절기 따라 꽃은 피었다 지고, 떨어져 물에 씻기운 꽃은 내를 타고 흐른다. 세월이 흐른다. 21세기가 된다.
봄꽃 열흘 가는 법 없고, 꽉찬 달 이울기야 예나 지금이나 여여한 일 아닌가. 궁도령이요 파락호였던 대원군의 그 서슬 푸른 세도는 어디로 갔던가? 권력의 뒤안길에서 그 비정함의 울분을 달래어주던 의정부 백석천이, 그 탓에 머리 풀고 드러누운 것은 아닌가? 대원군이 대원왕으로 추봉되고도 한 세기가 더 지나, 그가 솔숲 사이에 기거했던 곧은골 산장은 빌라가 되고, 이웃엔 유치원이 들어 서, 이곳은 얼치기 도심이 되었다.
옛이야기 찾아 흥선 등산로로 산책을 즐겨도 좋다. 동리에 솔내가 풍기지 아니하여도, 천변 투명한 물결에 자갈이 들여다 보이지 아니하여도 좋다.
아관파천 뒤 이곳에 처연히 들어 앉은 대원위 대감은 물 위에 뜬 구름 한 조각을 보며 뭔 생각을 하시었을까? 돌 화로에서 끓는 물로 한 잔 차를 내어 마시며, 짙은 향내를 음미하셨을까? 칠백년 묵은 용설승단차는 이 때까지 남아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