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 서인 정권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집단이었다. 나라와 백성에게는 무능했지만 집단 이익에는 천재였다.
인조 정권은 정묘호란을 예견했지만 대비책은 가관이었다. 국방력 강화는 뒷전이었고 오로지 정권의 파천(도피)에만 몰두했다. 대책회의 주제가 남한산성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강화도가 안전하냐? 였다.
후금의 침략 의도도 외면했다. 후금 정부가 조선 침공을 놓고 홍타이지(훗날 청 태종)의 강경파와 누루하치(청 태조)의 온건파로 대립 중인 것도 몰랐고, 누르하치 사후 홍타이지가 명과의 최종 결전 전에 후방 안전 도모를 위해 조선을 선제압하려는 의도도 알지 못했다. 그저 정권의 안위를 위한 파천 계획만 몰두했다.
청의 주 침공로는 서북. 즉, 평안도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요동을 정렴했기에 의주를 거쳐 수도 한양 점령을 위한 최단거리였기 때문이다.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 등 천혜의 방어선도 있었지만 인조 정권은 손발 다 놓았다.
더 기가 막힌 일은 북부 전선에 병력을 증강하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봐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또한 후금은 명과의 일시휴전 간 일부 병력을 조선 전선으로 이동 배치했기 때문에 장기전이 불가했고, 조선의 명과의 친교 단절을 목적으로 결행한 단기전이었다는 정세분석도 무지했다.
결국 조선 백성만 후금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대신 인조 일가와 서인 정권은 살아남아서 정신 승리했다.
6월3일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부산하다. 한편에서는 기득권 고수와 내년 지방선거 공천에 목을 매는 것 같다는 여론이 나온다. 망하는 집구석은 있어도 그들의 기득권은 변함이 없을 듯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