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
곡성군청에 출장 간 김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에 가 보았습니다. 20대 초반에 청년 가슴을 온통 뒤흔든 시집들인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겨울공화국’(양성우)과 더불어 조태일 시인(1941-1999)의 시집 ‘국토’는 시대의 불의에 대해 ‘비장한 저항심’을 어찌 가져야 할지 제게 가르쳐준 경전이었습니다.
소설에서는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가 선암사 대처승(조종현)의 아들이었고, 시에서는 조태일 시인이 태안사 대처승(조봉호)의 7남매 중 넷째였습니다. 그의 부친은 다른 형제들이 ‘기’자 항렬임에도 불구하고 조태일 시인에게만은 태안사의 ‘태’자를 이름에 넣었습니다.
얼마 전 출간한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의 책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창비, 2021)에 보면, 염무웅 선생은 조태일 시인과의 인연을 첫 장에 할애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그는 말과 행동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인물이었다. ‘표리부동’이란 조태일의 사전에는 없는 낱말이었다.”(p.19) “자기 시대의 불의에 온 몸으로 맞섰을 뿐만 아니라 조국 강산과 고향 산천의 아름다움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 뛰어난 시인의 삶과 문학을 그리워하며 거듭 찬미한다. 그립구나, 조태일!”(p.22)
‘식칼론’ 등 8권의 시집을 상재한 조태일 시인은 두주불사의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환갑을 못지내고 일찍 세상을 뜨셨습니다.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대구 출신 전태일(1948-1970)이 23세의 어린 나이로 분신하는 것을 보고, 또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도륙당하는 것을 보면서 시인의 그 맑은 성정에 난 마음의 상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일찍 세상을 등진 건 아닐까 생각하니 가슴 한 편이 심하게 아려왔습니다.
그래서 시문학관 바로 옆 태안사 대웅전에서 108배를 올리며 시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태안사는 신라말 선종을 표방한 9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이 있던 곳입니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저는 효령대군 18대손입니다)이 조선 초 이곳에 머무를 때 ‘완당’을 건축하였으며, 대바라(보물 956호)를 만들고 완당완기를 남겼습니다. 효령대군이 태안사에 처음 올 때가 59세(효령대군은 91세까지 살았습니다)였는데 저도 대군과 같은 나이에 이 곳에 처음 오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곡성은 ‘추격자’를 만든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의 촬영지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 ‘뭣이 중한디!’의 김환희가 경찰관인 아버지 곽도원이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옷핀을 사던 석곡초등학교 앞 문구점이 이제 폐업해버려 아쉬웠습니다.
그 아쉬움은 또 다른 영화촬영지인 ‘산포식당’(식당 차리기 전 건물 2층에 ‘산포노래장’이 있어 그냥 식당 이름을 ‘산포식당’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의 맛있는 김치찌개와 콩나물해장국으로 달랠 수 있었습니다. 정읍 신태인이 고향인 주인장은 입담, 손맛, 마음씀새 등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습니다. 곡성 가면 꼭 들러보세요. 곡성 매일시장 안에 있습니다. 식사 후에는 ‘곡성작은영화관’에서 멍 때리며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인류에게 큰 경종을 울려 근원적 성찰을 요구하는 작금의 코로나 시대, 나 홀로 곡성의 시문학관과 절에 가서 자연의 큰 가르침을 배워오는 건 어떨까요?
contemplate – plate
접시(plate)에 담긴 사찰(temple) 채식 음식을 먹으며 지구의 미래에 대해 성찰하다(contemplate)!
.jpg)
.jpg)
.jpg)
.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