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낭만파 시대를 이끈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는 1833년 5월 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함부르크 시립극장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으며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은 성실한 가정주부였다.
브람스는 아버지에게 음악적 재능을, 어머니에게서 성실한 성품을 물려받아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과 첼로 등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들의 재능이 비범한 것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브람스가 일곱 살 되던 해 코셀이라는 선생님에게 보내 피아노를 배우게 하였는데 열 살 무렵에는 각종 음악회에 나가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게 되었다.
코셀은 브람스의 실력이 자기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스승인 마르크센에게 보냈다. 마르크센에게 3년간 피아노와 작곡을 배운 브람스는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피아니스트로 음악계에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그의 음악 인생은 순조롭게 풀리지 않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술집, 식당, 사교장 등을 돌아다니며 피아노 연주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결코 음악가의 꿈을 잃지 않고 합창단을 지휘하거나 합창곡을 편곡하며 당시의 낭만주의 문학작품 독서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성실한 단면을 보여주는 삶이었다.
그런 그에게 일생을 바꾸는 두 번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첫 번째 기회는 1853년 당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과의 만남이었다. 브람스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본 그가 당시 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에게 브람스를 소개한 것이다. 이후 슈만과 클라라는 브람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슈만은 1853년 음악신보 10월호에 브람스의 뛰어난 음악성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당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그의 부인 클라라는 연주회를 통해 브람스의 피아노 작품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이 두 사람의 후원에 힘입어 피아노 소나타 제1번, 피아노 소타나 제5번을 작곡하고 출판까지 하게 되었다.
9년 후인 1862년에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함부르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초빙된 것과 오스트리아 빈의 징 아카데미 지휘자로 일하게 된 것이었다. 이 때부터 5년간 브람스는 빈과 함부르크를 오가며 창작활동을 왕성히 하였다. 이 시기 스승 슈만과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레퀴엠(독일진혼곡)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헝가리 무곡도 발표하여 작곡가로, 지휘자로, 피아니스트로 입지를 굳건히 하게 되었다.
브람스의 일생에서 가장 가슴 아린 사건은 스승의 부인 클라라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는 클라라를 일편단심 사모하는 마음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것이다. 1844년 4개월에 걸친 슈만과 클라라의 러시아 연주여행 여파로 슈만은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으며 심해진 조현병으로 다음해 1854년 결국 라인강에 투신 자살을 시도하였다.
다행히 슈만은 구조되었으나 브람스는 자기 스승의 병환과 일곱명의 아이들과 함께 남겨진 클라라를 지켜보며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브람스는 클라라와 슈만의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며 실의에 빠진 클라라를 위로하다가 예기치 못한 감정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클라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저분은 스승의 부인이므로 존경할 뿐이다”라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평생 동안 클라라와의 우정을 지켰다. 자살을 시도한지 2년 만에 슈만은 4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브람스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가 이 때 발표한 레퀴엠(독일진혼곡)은 슈만을 애도함과 동시에 슬픔에 처한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40년 동안 우정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초기에는 ‘경애하는 부인’에서 세월이 지나며 ‘나의 클라라에게’로 호칭이 달라졌지만 우정을 지키려는 마음을 끝내 잃지 않았다. 클라라를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의 사랑은 평생 흔들리지 않고 우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절제하며 내면의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다.
브람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여인들이 브람스 주변에 모여들었지만 브람스는 다른 여인들에게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클라라를 향한 마음에 이런 일들이 매우 귀찮게 여겨졌다. 한 번은 파티에서 브람스 주위로 많은 부인들이 몰려들자 이를 귀찮게 여긴 브람스는 평소 잘 피우지 않던 담배를 계속 피워댔다.
부인들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한 사람이 따져 물었다. “선생님. 여자들 앞에서 그렇게 담배를 피우시다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브람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천사들이 있는 곳에 구름이 있는 건 당연하지 않겠소.”
1896년 봄. 그의 63번째 생일 며칠 뒤 그가 한평생 사모해 오던 클라라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그는 삶의 의욕을 잃고 만다. 그리고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며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간암으로 쓰러져 다음해 봄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 눈을 감고 만다. 삶을 지탱해온 사랑을 잃자마자 그에겐 삶의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브람스는 평생을 단 한 사람만을 가슴에 품고 살았으며 그조차 이성을 가지고 철저히 절제하며 살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같은 브람스의 모습에 대해 “내면의 정열을 이성이라는 테두리에 가둔 채 걸어왔다”고 평가했다. 클라라를 향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이성으로 절제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했다는 것이며, 이런 브람스의 성격과 태도는 사랑만이 아니라 그의 음악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성실함을 바탕으로 절제와 조화를 중시한 음악가였다. 브람스의 일편단심 민들레 사랑을 회고하면서 내면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꾸밈없이 그대로 나타내는 진짜 웃음을 웃어보기 바란다.
하하웃음행복센터 원장, 의정부제일간호학원 원장, 웃음치료 전문가(1급), <웃음에 희망을 걸다>, <웃음희망 행복나눔>, <15초 웃음의 기적>, <웃음은 인생을 춤추게 한다>, <일단 웃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