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로마시대 때 원정 전투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들을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 말은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를 가진 풍습이었다.
죽음은 언제 우리에게 찾아올지 모르며 사람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의 종착역은 죽음이며 어느 누구도 이러한 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 생활의 모든 근심 걱정 고통은 헛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로마시대 외쳤던 “메멘토 모리”는 죽음 자체를 기억하라는 뜻이 아니고 내 삶의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죽음의 자리를 항상 명확히 인식하고 현재 주어진 짧은 생에서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찾고자 했던 그들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죽음만큼 절박하고 절대적이고 중요한 것은 없다. 그래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죽음의 문제는 오늘 나의 삶을 살아내는데 너무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집착을 부리거나 욕심을 부리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음의 의식은 삶의 시야를 넓혀주고 죽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삶을 조명해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히 밝혀주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필자가 강의할 때 자주 인용하였던 프랑스의 샹송 아이콘 국민가수 줄리엣 그레코가 2020년 9월23일 93세의 일기로 저 세상으로 떠났다. 영국 BBC는 그녀의 부음 기사를 올리며 샹송의 대모 줄리엣 그레코가 프랑스 남부 라마튀엘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밝히며 그녀의 일대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녀는 1927년 2월7일 지중해 인접 도시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코르시카섬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려 조부모와 수녀들 손에서 자랐다. 파리로 이주한 뒤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나치 독일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했다. 어머니와 언니는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지고 줄리엣 그레코는 나이가 열 다섯이라 파리 남부의 다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녀는 풀려났고 입을 옷이 없어 바들바들 떨며 수십㎞ 떨어진 집까지 걸어왔으나 아무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다. 그 당시 그녀는 배고픔의 허기를 잊으려고 담배를 피웠을 정도로 궁핍했다. 그녀는 단지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리 생제르망 데쁘레의 지하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가 그녀를 불러 칭찬을 하였다. “노래를 부를때 너의 눈에서는 만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아.” 칭찬에 고무된 그녀는 전심을 다해 영혼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면서 차츰 그녀를 알아보는 이들이 늘었고 점점 인기도 높아져 갔다.
1953년 배우 필립 르메에르와 결혼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이혼하였고 그로 인해 우울증이 생겼다. 그녀의 상처받은 영혼은 또 다른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면서 유명한 러브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그녀가 노래 부르던 데쁘레 카페에는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드나들기도 하였지만 젊은 불량배들이 패거리로 몰려오기도 하였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젊은 불량배 패거리 중 한 명이 비를 흠뻑 맞은 채 가죽 점퍼를 입고 쫓기듯 두려운 표정으로 카페에 들어와 앉았다. 그레코는 샹송을 부르면서 이 젊은이를 유심히 관찰하였고 노래를 마친 후 그 젊은이에게 접근하여 합석하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날 그 젊은이 이름이 알랭 들롱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이는 20세로 그레코보다 9살 연하였는데 그레코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그에게 마음이 끌린 이유는 미남이어서가 아니라 광야에 내던져진 야수와도 같은 처절함을 그에게서 느꼈기 때문이다.”
그레코는 자신이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을 지닌 젊은이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위로해주고픈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알랭 들롱은 부모의 이혼, 세상의 천대, 의붓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청소년 내내 반항아로 자랐지만 포근한 그레코의 모성애에 빠졌고 그녀의 위로를 받으며 세상의 한 줄기 희망의 불빛을 보았다.
드디어 1957년 그레코의 주선으로 알랭 들롱은 영화계에 진출하였으며 그의 차가운 이미지와 미모로 곧 세계 여성팬들을 사로잡았다. 알랭 들롱은 벼락출세 후 그레코의 곁을 떠났고 그레코는 매달리지 않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떠나보냈다. 사랑은 강물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조용히 천천히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2016년 89세의 나이에 팬들 앞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였는데 오히려 젊은 팬들이 많아 세상을 또한 놀라게 하였다. “오랫동안 시인이 사라진 후에도 노래는 여전히 거리에 흐르고 있어요. 어느 날 어쩌면 내가 정말 죽은 후에도 사람들은 내 노래를 할거예요.” 그녀의 노래 ‘시인의 혼’의 가사처럼 그녀는 갔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 ‘고엽’을 이 가을에 부르고 있다.
메멘토 모리! 줄리엣 그레코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구를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새겨본다. 그리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웃으면서 만들어 가야겠다고도 다짐해 본다.메멘토 모리를 마음 속에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모든 삶을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하 웃음행복센터 원장, 의정부제일간호학원 원장, 웃음치료 전문가(1급), <웃음에 희망을 걸다>, <웃음희망 행복나눔>, <15초 웃음의 기적>, <웃음은 인생을 춤추게 한다> 저자